* Y님 커미션(대공형제)
어촌 쥬노가 쥬노 대공국이 되었다. 이름을 대도 ‘그게 어디지?’ 하는 반응이 전부였던 작은 마을은 금발의 형제가 도착한 뒤로 무섭도록 융성했다. 어촌은 교량을 늘려가며 몸집을 키워 도시가 되었고, 다리 위에 세워진 도시는 사람을 끌어들이며 한 나라로 우뚝 섰다.
그리하여 이제 웅장하게 세워진 건물이 있다. 오로라 궁. 이름만 듣기로는 오색찬란할 것 같으나, 대리석을 기조로 하얗게 올려진 궁이다. 거기에는 대공께서 업무를 볼 집무실을 비롯해 내정에 필요한 온갖 시설이 있었고, 외빈들을 맞이하는 등 대외적인 활동을 위한 실들이 빼곡했다. 내정과 대외 업무의 중간다리 역할을 할 만한 장소도 있었다. 층 절반 넘게를 차지한 커다란 홀이 그것이다.
오로라궁을 설계한 캄라나트가 이를 두고 다용도실이라고 말해 인부들을 혼란에 빠지게 했으나, 건물을 다 올렸을 즈음에는 모두가 그 명칭을 이해했다. 대공이 말한 다용도실은 창고의 의미가 아니었다. 탁자와 의자를 갖추면 즉석에서 백 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는 회의실이 되며, 앉을 자리를 치워 창고로 옮기면 단번에 널찍한 무도회장이 되는 거다. 마음만 먹으면 간단한 축제, 신임 기사 임명식 등등 온갖 것을 할 수 있는 장소. 문자 그대로의 ‘다용도’다.
게다가 중정 근처에 어스름히 빛이 들어오면 어느 한 자리가 조명을 독차지하며, 그 자리에는 대공이 앉거나 설 자리라는 게 알려졌을 때는 모두가 감탄했다. 계절마다 빛의 가늠이 달라질진대 대공께서는 그조차 계산했다는 뜻이니까.
쥬노 대공국의 궁이 준공되었으나 당장 사용하지는 않았다. 캄라나트 초대 대공이 쥬노가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인 양 절차와 예식을 깐깐하게 따진 탓이다. 즉, 면을 맞댄 이웃 국가마다 사절을 보내 임관식에 초청했다는 말이다. 그가 진두지휘한 임관식 일정은 정말로 휘황했다. 이른 오전부터 민간인들에게도 궁을 개방해 공개적으로 임관을 진행하고 관직을 임명하며 내각과 군대를 출범한다. 점심은 루루데 가든을 통째로 열어 뷔페를 차리고 애프터눈 티까지 대접하면 민간인은 소개한다. 이후 오로라 궁에서 외빈과 함께 외교 문제를 논의하고, 저녁 만찬을 가진 뒤 무도회가 자정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정식 임관 전에는 오로라 궁의 집무실을 쓰지 않겠다고 캄라나트가 선언했으므로, 위엄있는 하얀 궁을 놓고서 실무자들은 궁 근처 임시로 지어둔 사무실 겸 초소를 들락날락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드디어 임관식이 내일이다. 해 뜨기 전부터 일정이 빽빽할 것이기에 하인을 비롯한 모든 궁 관계자에게는 일찍 돌아가 쉬라는 명이 내려졌다. 오늘 마지막 업무는 서류들과 집기 일체를 오로라 궁에 있는 집무실로 옮기는 일이었다. 들고 있는 짐이 무거웠지만 모두가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번영을 이끈 금발의 미청년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물러났다.
주변에서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 캄라나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버거워서도 아니고 피곤해서도 아니다. 그저 귀찮을 뿐. 의도하고 유도한 바이나 날벌레 같은 현 인류(이들에게 인류라는 표현을 붙이기에 충분한가?)에게 하루 종일 둘러싸여 있는데 별수가 있겠는가. 오로라 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면 운신에 훨씬 숨통이 트일 테다. 보잘것없는 어촌은 어엿한 한 나라로 키워냈으니 차라리 익숙한 예법이 돌아올 것이고, 그러면 다소 편안해지겠지. 머릿속으로 내일 하루 예정을 되짚어보던 그가 문득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도회라….”
“사 분의 삼박자 왈츠를 준비했다고 해.”
“…엘드나슈.”
무도회장에서 춤을 춘 게 언제였나를 떠올리고 있는데 돌연 곁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났다. 어느샌가 나타난 엘드나슈는 무엇이 즐거운지 키들키들 웃는 낯이었다. 좋은 징조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기분 나쁜 것보다야 훨씬 나았으므로 캄라나트는 형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곱슬거리는 금발이 저녁놀에 닿아 반짝거리고 있다. 흥얼거리는 콧노래는 분명 그가 언급한 왈츠다. 슬로 왈츠일 줄 알았다는 중얼거림에 엘드나슈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들을 조금 부추겼지.”
전통에서 오는 관록을 보이는 건 오로지 대공과 소대공 뿐이다. 고관으로 임명될 몇몇 동족은 귀족처럼 굴지 않기로(적당히 현세계에 맞추기로) 했으니, 예법에 대해선 모르쇠 중이다. 그러니 궁 기악대가 참고할 만한 연주곡은 이웃 나라의 느린 곡밖엔 없겠다 싶었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엘드나슈가 입김을 불어 넣은 모양이다. 그리움이라고 부르기엔 얄팍한 수런거림에 캄라나트의 반듯한 표정이 미묘하게 무너졌다. 그 낯익은 곡조는 왕가에서 여는 무도회에 반드시 첫 곡으로 나오는 왈츠였다. 형이 성인이 되었을 적에도 홀 중앙에서 선보였고(따라서 누님 역시 추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저 역시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춘 적이 있는 곡. 쥬노를 선택해 한 나라로 키워가며 세부 사항은 전부 제게 내맡기고 진세계를 강림시킬 방법에만 집중하던 형이 갑자기 무슨 일로 변덕을 부린 걸까. 어쩌면 이 어수선함은 그리움이 아니고 심란함일지도 몰랐다.
“아우야, 너 춤은 기억하니?”
“그럼.”
캄라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곱게 묻는 말이지만 푸른 한쪽 눈동자가 갸름해진 것으로 보아, 이게 다정하게 받아들일 물음이 아님을 알았다. 걱정을 토대로 한 질문이 아니고 네가 체면 구기지 않을 준비가 되어있느냐는 판별이겠지. 비록 만 년을 잠들어 있었다곤 하나, 갖추었던 예법을 잊지는 않았다. 왕족으로서 춤은 당연히 익혀야 할 소양이었으므로. 즉답에 엘드나슈가 숨죽여 웃더니 몸을 빙글 돌렸다.
“자, 그러면 확인 좀 하자. 따라 와.”
동생은 군말 없이 형의 등을 뒤좇았다.
내일 무도회장이 되어줄 홀은 마냥 하얗고 고요했다. 노을이 다 불타 사라진 자리에 어둠이 깃들어 켜켜이 쌓였고, 중정을 통과해 스며든 달빛이 은가루처럼 드문드문 빛난다. 천으로 덮여 윤곽만 드러난 오케스트라의 자리는 거대한 석고덩이가 제멋대로 자라난 모양새다. 아름다움과 기괴함이 동시에 공존하는, 아직 누구도 제대로 밟지 않은 플로어에 형제가 나란히 마주해 섰다.
엘드나슈가 가볍게 발을 구르자, 소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여기까지야 캄라나트도 예상했다. 그러나 곧, 곧고 고운 눈썹이 의아함을 담아 꿈틀했다. 반 뼘쯤 낮은 눈높이와 내민 손의 방향으로 보아 그의 형은 기꺼이 (변덕으로) 여성 측 스텝을 밟아 줄 모양이다. 그런데 엘드나슈가 어떻게 이걸 아는 거지. 기억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어릴 적 사교 교육을 전담하던 담당 교육관이 남성 스텝을 가르쳐주던 모습만 떠올랐다. 그 꼬장꼬장하던 작자가 알려줬을 리 만무한데. 골몰하기 시작한 그는 다른 기억까지 모조리 헤집었다.
제 손에 고정된 시선이 어딘가 아득해져 엘드나슈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속이 너무 훤히 보인다, 아우야. 형은 동생 눈앞에서 드밀었던 손을 휘저었다. 갑자기 현실로 끌려 나온 청안이 팔랑인다. 그 얼빠진 모습을 타박하는 대신, 다른 행동을 하기로 했다. 소년이 뻗지 않은 다른 손을 휘적이자, 악기들에 덮인 천이 걷히고 저 홀로 연주를 시작했다. 사 분의 삼박자에 맞춘 관현악기의 풍성한 울림에 경쾌한 음색의 챔벌로가 이리저리 음표를 밟는 왈츠곡. 좀 전 흥얼거렸던 곡조가 본래 모습을 하고서 펼쳐졌다.
선율에 걸음을 싣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엘드나슈는 내친김에 조금 더 변덕을 부리기로 했다. 퉁명스런 목소리로 입을 연다.
“무도회에서 관찰할 게 뭐가 더 있겠어. 자.”
“아.”
납득했다는 듯한 외마디와 더불어 캄라나트가 겨우 손을 뻗었다.
가볍게 에스코트한 손은 곧 풀리고, 원 투 쓰리. 박자에 맞추어 인사. 가볍게 멀어진 몸이 챔발로의 유쾌한 음정에 맞추어 걸음을 옮긴다. 원 투 쓰리. 은색 달빛이 얼음처럼 깔린, 순백의 무도회장 위에서 형제가 스텝을 밟았다. 중심부에서 시작된 춤은 꽃이 피어나듯 서서히 넓은 원을 그리고, 엘드나슈가 허공을 디딜 때마다 구두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마치 처음 춤을 배울 때, 등 뒤에서 교육 담당이 박수로 박자를 재어줬던 것처럼. 연상된 이미지 탓에 캄라나트의 등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맞댄 몸에서 근육이 긴장하는 게 전달되자 엘드나슈가 킬킬 웃다가 이어진 턴에서 무게를 확 실어 경로를 비틀었다. 왈츠를 기억하고 있다던 캄라나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는 돌연한 사태를 맞이하고도 박자와 스텝 그 어느 것도 잃지 않았다. 냉담하기까지 하던 청안에 불만이 깃든다.
“형.”
“너무 정석대로면 심심하지 않겠니.”
“여기 올 놈 중에 실수할 녀석이 있을까 싶은데.”
“있을지 또 어떻게 알아.”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 걸까. 캄라나트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형이 이끄는 박자를 완벽히 에스코트하기 위해 집중했다. 무슨 짓을 해도 휘말리지 않겠다는 고집이 느껴졌으니, 엘드나슈는 장단을 맞춰주기로 한다. 보폭을 어긋 내고, 턴 직후 다음 댄스 파트너가 온 것처럼 굴고…. 정석과 변칙, 음표와 음표 사이를 마음 가는 대로 밟아대면서 엘드나슈는 굳이 말하지 않은 과거의 편린을 떠올렸다.
왜 그가 여성 측 스텝을 알고 있느냐고? 답은 간단하다. 육체가 시간을 비껴간 이래, 엘드나슈는 굳이 왕실 무도회에서 춤을 출 일이 없어져 구경만 물리도록 했으니까. 그렇다면 왜 관심을 가지고 외웠냐 묻는다면-.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결단코. 원 투 쓰리, 턴. 곡조가 한 바퀴 돌았다. 이다음은 변조된 가락이지. 정육각형의 남은 세 변을 그리는 구간, 그중에서도 마지막 피날레는 몸치에겐 어려운 난도였다. 어떤 역할의 스텝도 어렵게 느끼지 않았던 그에게 ‘누군가에겐 (놀랍게도) 어려울 수 있다’고 알게 된 일이 있었더랬다.
‘아마 데뷔탕트였지.’
하급 귀족의 고명딸이었을 거다. 성인식 반년 전부터 누님을 만나러 오기에 신관의 축복이라도 원하나보다 했다가 우연히 들여다 보았던 연주실.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이브노일의 나직한 목소리와 저희가 스스로 세고 있는 박자와 겹쳤다. 마지막 구간 스텝을 도무지 못 하겠다며 울상 짓던 영애를 다독이던 누이.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남성 측 스텝을 밟던 모습을 보았기에 엘드나슈는 굳이 부득불 써먹지도 않을 왈츠를 눈동냥으로 익혔다. 그건 아이다운 발돋움 같은 치기였을까, 아니면―. 이어질 뻔한 문장은 곧 가볍고 깊은 애증으로 타올랐다.
원 투 쓰리. 턴, 다시 턴. 세 걸음 멀어지고, 두 걸음 가까이. 아래위로 손을 서로 얹고, 나붓한 헤어짐의 인사.
은막 같은 홀을 한 바퀴 돌고 뒤꿈치를 마침표처럼 눌러 찍자, 거짓말처럼 음악이 뚝 멈췄다. 도려낸 듯한 정적과 바투 붙어있기에 느껴지는 조금 가빠진 숨소리. 엘드나슈는 그제야 제가 좋지 못한 댄스 파트너의 표본(실력이 좋기에 상대를 시험하는 부류)이었음을 깨달았다. 강다짐에도 쉬지 않고 춤을 춘 파트너는 이제 눈높이가 낮아진 그를 가만히 굽어본다. 뭔가를 기다리는 눈초리가 진정으로 유순했다. 엘드나슈는 입가를 쭉 찢어 웃었다. 손아귀에 넣고 굴려 온 아우의 표정을 보자마자, 무슨 말을 원하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좋아. 합격. 몸치인 파트너가 있더라도 문제없겠어.”
바라던 대답이었는지, 푸른 두 쌍의 눈동자에 은은하게 온기가 깃들었다. 마치 이브노일의 방에서 기쁘게 나서던 영애처럼.